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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사진출처:MBC)

시청자들의 드라마 볼거리에 대한 눈높이는 높아졌습니다. 과거에는 해외 로케만 하더라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차량 추격전이나 총격전만으로도 볼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었죠. 하지만 지금 그런 단순 볼거리는 더이상 시청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지 못합니다. 몇 년 전부터 등장했던 일련의 블록버스터 드라마들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볼거리라도 어떤 스토리와 맥락을 갖거나 아니면 새로운 연출로 만들어진 볼거리가 아니라면 이제 '돈낭비'했다고 비난할 정도로 시청자의 눈은 높아졌죠.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그 시청자의 높아진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통상적인 볼거리에 이야기를 끼워맞추다 실패한 대작드라마들인 '로비스트'나 '태양을 삼켜라'의 후속작을 보는 것 같았죠. 다분히 의도된 첫 시퀀스로서의 스카이다이빙 장면은 마치 007시리즈의 한 장면처럼 멋진 것이었지만, 아무런 드라마의 이야기와 맥락을 갖지 못했습니다. 스카이다이빙 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툭 끊어지고 다음으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최강타(송일국)의 모습, 그리고 앞에 나타나는 성. 액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야기 전개도 아닌 이 그저 순전한 볼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면들은 송일국의 잘 다듬어진 몸이 아까울 정도로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 첫 장면은 그 후에도 계속 이 드라마가 가진 '맥락없는 볼거리'의 연속으로 이어졌습니다. 수영장 신, 요트를 타는 송일국의 동작 신, 본부(?)에서 펜싱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등등은 이야기 속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기 보다는 그저 "이 장면 멋있지 않아?"하며 볼거리에 집착하려는 드라마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내주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이야기로만 본다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단순 복수극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전략을 어떻게 짰어야 했을까요. 볼거리 위주, 즉 액션 위주로 가되 그 볼거리가 독특한 연출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리스'는 영화적인 연출을 통해 볼거리 자체를 즐기게 해주었습니다. '추노' 역시 레드원 카메라를 통해 액션만 쳐다봐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죠. 물론 이 두 드라마의 성공은 볼거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이리스'는 배우들의 호연이 그 뒷받침을 해주었고, '추노'는 연기는 물론이고 대본의 완성도까지 연출, 대본, 연기의 삼박자를 갖춘 드라마의 완성도를 보여주었죠. 이들 작품에는 그저 '보여주기 위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가 들어있었습니다. 즉 연출의 의도가 있었다는 점이죠. '아이리스'는 그 국가를 넘어서는 집단들이 만들어놓은 미궁 속에서 끝없이 허우적대고 흔들리는 개인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가 연실 흔들렸고 그 생존의 몸부림은 수없이 많은 컷으로 빠르게 나뉘어짐으로써 긴박감을 연출했습니다.

'추노'는 몸뚱어리 하나로 부조리한 세상과 대결하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그 몸에 집중했고, 그 처절한 몸부림이 심지어 아름다울 수 있게 연출되었습니다. 이 '아이리스'와 '추노'가 보여준 볼거리는 '로비스트'나 '태양을 삼켜라'가 보여주었던 그저 '볼거리를 위한 볼거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런 상황에 '신불사'가 '아이리스'나 '추노'의 볼거리가 아니라 '로비스트'나 '태양을 삼켜라'의 볼거리를 선택했다는 점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위해 수개월 동안 몸을 만들어온 송일국의 노력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배우가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걸 받쳐주는 대본과 연출이 없는 한 그 비난은 심지어 배우에게까지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드라마에 있어서 볼거리에 대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야할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볼거리는 그저 스펙타클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맥락을 잘 표현해내는 것이 볼거리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을 때, 그저 볼거리를 위한 볼거리로 전락할 때, 드라마는 매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가 도착하는 장면만을 찍어서 대중들을 매료시켰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미 우리네 대중들은 수많은 볼거리를 경험해왔고, 또한 드라마들도 새로운 볼거리를 보여주면서 성공사례를 만들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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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세상, '제중원'과 '추노'의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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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박성광이 개그콘서트에서 외친 이 말은 이제 유행어가 됐다. 반 농담처럼 앞에 각자의 답답한 심사를 수식어로 붙이고 "~하는 더러운 세상!"이라 말하면 빵빵 터지는 세상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유행어는 작금의 세상에 대한 불만, 특히 힘 있는 자는 잘되고 힘 없는 자는 안되는,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더 못 사는, 게다가 이것이 태생적으로 결정되고, 빈부에 따른 교육에 의해 확정되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담아낸다.

올 초부터 일련의 사극들이 저마다 천민의 삶에 집중하면서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작금의 세상이 점점 벌어지는 '삶의 격차'에 대해 그만큼 민감해져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중원'이 구한말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추노'가 병자호란 이후의 극심한 혼란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그 시기가 모두 신분의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제중원'은 천민 백정으로 한계 지워지는 더러운 세상에 태어나 의사가 되는 신분 상승의 사극이며, '추노'는 반대로 천민으로 전락한 자들이 '더러운 세상'과 저마다 부딪치는 사극이다. '제중원'이 긍정의 드라마라면, '추노'는 부정의 드라마다.

'제중원'은 백정과 양반이 다른 동네에서 살아가는 조선사회에 선교사 알렌을 등장시켜, 양반 백정이 똑같은 의생의 제복을 입고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제중원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이미 왕은 서양 문물에 호의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계급사회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석란(한혜진)에게 "정진하라"고 왕이 말하는 장면은 조선사회에서 여성에게까지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일을 권장한다는 측면에서 파격적이다.

이미 '제중원'이 그리는 시대는 양반 상놈의 계급 구조가 흔들리고 있었고, 중인으로서 역관인 유희서(김갑수) 같은 인물이 왕과 독대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 백정이 의사가 되는 성장과정에 주목하는 '제중원'이, 성장 또한 태생이나 배경으로 결정되어버리는 작금의 상황에 어떤 판타지를 제공한다는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대는 어쩌면 거꾸로 흘러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그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추노'로 가면 천민이 양반이 되는 성장의 판타지 따위는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수 세기의 세월을 건너왔지만 또다시 마주하게 되는 절망적인 현실이다. "사극은 과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곽정환 감독은 '추노'라는 수 세기 전에 벌어졌음직한 이야기 모티브를 통해 작금의 상황을 다차원적으로 들여다본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잔혹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만큼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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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사진출처:SBS)

송태하(오지호)와 이대길(장혁)이 서로 칼과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는 장면은 이 사극이 가진 비극성을 잘 드러내준다. 송태하는 "왕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이대길은 한 때 종이었던 혜원(이다해)을 사랑하며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 꿨던 인물이다. 하지만 송태하는 혜원이 종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직까지 잘 모르고 있으며, 이대길은 절망 속에서 그 꿈을 묻어둔 지 오래다. 그러니 그들은 정작 자신이 칼을 겨눠야 할 장본인을 찾지 못한다. 이대길이 송태하를 잡아오고, 그런 이대길을 이경식(김응수)이 다시 잡아들이는 설정은 토사구팽의 전형을 보여준다. 토끼와 사냥개는 어쩌면 같은 옥사에서 자신들이 싸워야 될 공통의 적, 즉 사냥꾼을 찾게 될 지도 모른다.

송태하와 이대길이 전락한 위치에서 자신들의 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명확한 적을 보여주는 인물들은 상놈의 세상을 만든다는 취지로 모인 노비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업복이(공형진)를 저격수로 세워 '더러운 세상'을 만들어낸 양반놈들을 저격한다. 그런데 여기서 업복이의 의구심은 이 사극이 단지 '세상을 전복하는 낭만적인 혁명의 판타지'를 꿈꾸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업복이(공형진)는 초복이(민지아)와 함께 밤길을 걸으며 묻는다. "양반 상놈이 뒤집어지는 세상보다 양반 상놈 없는 세상이 더 나은 것 아니냐"고.

업복의 말은 이상적이지만 그것이 어찌 쉬울까. 그 말에 초복은 "그것도 좋지만 그 전에 (자신과 가족이 당했던) 복수는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것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마음일 것이다. 혁명이 어려운 것은 뜻을 모으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모인 뜻에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뒤섞이기 때문이라고 '추노'는 말하는 듯 하다.

가까운 과거를 다루는 '제중원'에서 판타지를 느끼고, 더 먼 과거를 다루는 '추노'에서 오히려 작금의 현실을 느끼는 상황은 어딘지 잘못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은 점점 나아지지 않고, 그대로이거나 악화되고 있고, 그래서 더더욱 판타지에 열광하게 되는 '역행하는 시대'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젊은 세대들에게 G세대라고 일컬으며 그 영광의 판타지를 일반화하는 동안, 한편에서는 여전히 취업의 문 앞에서 좌절하고, 그 문 안에서도 88만원의 비정규직으로 살얼음판을 걸어가야 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천민 취급 받는 세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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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Tracked from tattermedia's me2DAY  삭제

    올 초부터 일련의 사극들이 저마다 천민의 삶에 집중하면서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작금의 세상이 점점 벌어지는 '삶의 격차'에 대해 그만큼 민감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러운 세상, '제중원'의 꿈, '추노'의 꿈>

    2010/02/26 10:45

복근에 담겨진 사회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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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드라마 '추노'는 몸뚱이 하나로 시대의 억압과 맞서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몸에 대한 연출은 '추노'가 가진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한다. 멋진 남자들이 훌러덩 옷을 벗어던지고 군살 하나 없는 복근을 보여주는 것이 단지 눈요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잘 단련된 복근이 드라마의 인기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최장군(한정수)이 숙소로 돌아와 지친 몸을 씻을 때 드러나는 복근 앞에서, 송태하(오지호)가 날이 엇나간 장도를 휘두를 때 언뜻 옷깃 사이로 보여지는 몸 앞에서 시청자들의 눈은 분명 호사를 누렸던 것이 사실이다.

'추노'야 그렇게 몸을 드러내는 것이 드라마의 연출의도와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드라마에서도 남성의 복근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트렌드처럼 되어 있다. '파스타'에서 까칠 쉐프 최현욱(이선균)은 이태리파 요리사들을 옥상으로 불러 모은다. 새로 온 오세영(이하늬) 셰프의 육수가 감칠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고 하는 건 좀 생뚱맞다. 다분히 복근 노출을 통한 팬 서비스(?)의 의도가 강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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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사진출처:MBC)

최근 송일국의 명품근육이 갑작스레 공개되며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런데 그 기사들에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주인공으로서의 송일국을 부각시켜 놓았다. '보석비빔밥' 후속으로 방영되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홍보를 위해 송일국의 몸이 먼저 공개된 것이다. 반응은 나쁘지 않다. 남자들이 드라마에 출연해서 쓸데없이 상체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과거를 생각해보면 작금의 복근 노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호의적인 편이다.

TV의 복근 노출은 드라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다투어 복근을 노출한다. 아예 대놓고 "좀 보여주시죠"하는 MC의 요청과 거기에 대해 거리낌없이 옷을 들춰주는 토크쇼의 풍경은 이제 흔한 것이 되었다. 이른바 '찢택연'으로 대변되는 짐승돌들은 옷을 찢어가며 복근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승승장구'에 출연한 2PM의 준호는 멋지게 춤을 추는 것보다 한번 옷을 찢는 퍼포먼스가 더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남성들의 복근 노출은 연예인의 몸에 대한 성 상품화가 여성에서부터 남성으로까지 넘어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복근이라는 특정 부위는 이러한 단순한 의미 이상의 것들을 담아낸다. 이것은 과거 불쑥 나온 남자들의 배를 '인격(?)'이라고 부르던 시대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당시 권위주의적인 사회 속에서 남성들의 매력은 자기 자신보다는 배경으로 점수 매겨지곤 했다. 따라서 배가 나온 것은 '여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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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배경 보다는 그 각자가 가진 고유한 매력으로 어필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격'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제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된 시대다. 사회가 축적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소비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못 먹어서 죽던 시대는 가고, 이제 많이 먹어서 죽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돈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오히려 자기 몸을 관리하는 데서 여유를 발견하게 된다. 즉 복근에는 이처럼 건강한 몸에서 연상되는 잘 관리된 삶의 태도(혹은 그렇게 관리할 수 있는 능력)가 투영된다.

이것은 작금의 대중들이 환호하는 남성과 여성들의 몸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태도다. 남성들의 복근처럼, 여성들의 이른바 '꿀벅지'는 이러한 건강한 몸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과거처럼 남성들의 시선에 포획되어 억압받아온 바짝 마른 허벅지가 아닌, 스스로 건강한 허벅지의 노출이 잘 관리된 삶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근 노출은 단지 성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남성들의 삶까지 투영하는 매력의 상징이 되었다. 게다가 몸은 정직하게도 노력하는 만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어떤 진정성까지도 갖고 있다. 드라마에 내용과 상관없이 남성들이 복근을 드러내고, 가수들이 앞다퉈 옷을 찢으려는 것은 그 매력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연기나 노래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이 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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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Tracked from tattermedia's me2DAY  삭제

    이것은 과거 불쑥 나온 남자들의 배를 '인격(?)'이라고 부르던 시대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당시 권위주의적인 사회 속 남성의 매력은 개인보다 그 배경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배가 나온 것은 '여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던 것. <TV, 복근의 전시장이 된 이유>

    2010/02/18 15:26
  2. 여자 연예인의 술광고, 해도 너무하다

    Tracked from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삭제

    요즘 광고는 이미지를 팝니다. 이 물건이 얼마나 좋은지 하나하나 알리기보단 유명인들을 데려다가 행복한 표정을 짓게 하죠. 이 물건을 사야 행복해질 거라고 광고는 속삭입니다. 이런 광고가 대중매체뿐 아니라 골골샅샅이 없는 데가 없고, 이미지가 쳐놓은 그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xml:namespace> 마구 쏟아지는 이미지를 만만하게 볼 수 없죠. 이미지들은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의식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까요. 이..

    2010/02/18 17:15
  3. 新天地、新約の約束した救いの場所

    Tracked from 日本語  삭제

    本当に正しく知りましょう。聖書と新天地 この内容は教会や聖徒の信仰知識のために共益的な目的で聖書を根拠として書いたものです。  また、この内容は教会や聖徒たちの真信仰のため「あなたがたは、然り、然り、...

    2010/02/19 15:14

‘추노’는 어느 길을 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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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사극이 과거를 이야기하던 시대는 지났다. 사극은 이제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이야기한다. 사극 ‘추노’가 그렇다. 이 사극에서 역사는 한 발짝 저 뒤로 물러나 있고 대신 그 역사적 시점 위에 현재적 의미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양반이었으나 추노꾼으로 전락한 이대길(장혁), 한 때 타고난 무사로 소현세자와 함께 꿈을 꾸었으나 도망노비로 전락한 송태하(오지호), 한 때 태하와 동문수학하던 사이였으나 이제는 그를 누명에 빠뜨리고 스스로 암살자가 되어버린 황철웅(이종혁). 이들은 모두 ‘전락한 인물’들이다.

이대길은 송태하를 추격하고, 송태하는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인 석견을 제거하려는 황철웅을 추격하며, 황철웅은 송태하와 맞서며 석견을 추격하는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 목숨을 걸고 행하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일이어야 하는 상황에 이들의 비극이 있다. 그 이면에는 이경식(김응수)이라는, 이 시스템을 쥐고 있는 희대의 권력자가 자리한다. 그는 대길을 시켜 태하를 추노하게 하고, 철웅을 시켜 석견을 제거하려 한다. 태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 석견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다.

이 자신이 소외되어 있는 상황은 바로 이 사극이 그리려는 노비의 상징적인 의미를 캐릭터를 통해 그려낸다. 드라마가 어떤 캐릭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성을 지닌다고 볼 때, 이 사극은 자신이 소외된 노비적인 상황 속에 갇힌 캐릭터들이 그것을 뚫고 나오는 지점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고 볼 수 있다. 즉 대길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추노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찾게 될 때, 태하가 대의라는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될 때, 철웅이 누군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위치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때, 이들 캐릭터들의 문제는 해결된다.

이것은 결국 이 정교한 시스템 속에 있어 그 시스템을 보지 못하는 이 인물들이 바깥에서 그것을 통찰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밖에서 보면 대길이나 태하나 철웅은 결국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력을 쥔 자가 아니라 권력에 휘둘려 비극적 운명에 던져진 자. 결국 시스템의 꼭대기에 있는 이경식이라는 인물이 자신들의 엇갈린 운명을 조종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향해 동시에 칼을 겨누게 될 때 이 ‘추노’가 현재에 던지는 결코 작지 않은 질문은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의식은 이미 ‘양반을 죽이고 상놈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당’과 그 속에 들어가는 업복이(공형진)라는 캐릭터로 극단화되어 있다.

권력을 쥔 자와 권력에 휘둘리는 자들과 그 권력에 반기를 드는 이 세 축의 힘은 결국 말미에서 하나로 부딪치면서 해결책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드라마의 영상미학이라고 불리는 이 사극이 소재나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충분히 걸작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와 그 시스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초들에게 이 사극은 충분히 시사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 걸작이 될 수 있는 ‘추노’에 드리워진, ‘범작으로의 후퇴’도 예상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멜로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길의 문제가 시스템 속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엇갈린 사랑이 가져온 비극이라고 그려질 때, 태하의 대의명분 속에서 희생된 개인의 행복이 섣불리 길에서 만난 혜원(이다해)과의 사랑으로 채워질 때, 이 사극은 걸작의 길에서 범작의 길로 내려서게 될 위험이 있다. 과연 ‘추노’는 어느 길을 걸어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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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남성 캐릭터 전시장, '추노'의 여성 캐릭터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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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추노'의 이다해가 또 구설수에 올랐다. 과도한 화장, 노출신에 이어 이번에는 극중 송태하(오지호)와의 갑작스런 키스신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항간에는 언년이 살생부, 혹은 '추노 데스노트'가 화제가 될 정도다. 언년이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이다해 때문에 줄초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다해가 이렇게 드라마 속 캐릭터를 연기하며 논란이 됐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에덴의 동쪽'이 방영될 때, 그녀는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다가 도중에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유는? 캐릭터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민혜린이란 캐릭터는 극 초반에는 거대 언론사 사장인 아버지에 반항하는 인물로 그려졌는데, 후에 가면 그 언론사의 실질적인 주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변모한다.

여성 캐릭터로서의 멜로에 있어서도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는 요령부득의 인물이었다. 그녀의 언니인 혜령의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 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노동운동을 함께 하던 이동욱(연정훈)과 연인관계인 듯 보였는데, 나중에는 그 형인 이동철(송승헌)을 짝사랑한다. 말 그대로 전형적인 민폐형 캐릭터에 상황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인물이니 이다해로서도 연기한다는 게 실로 어려웠을 터다.

그렇다면 '추노'의 언년이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추노'에는 멋진 남성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대길(장혁), 최장군(한정수), 왕손이(김지석)는 드라마판 '놈놈놈'을 연상시킬 정도로 멋지게 그려지고, 그들이 추적하는 송태하(오지호) 역시 슬픈 운명 속에 굴하지 않고 서 있는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만들고 있다. 때론 해학적인 느낌을 주는 업복이(공형진)는 물론이고 심지어 악역을 맡고 있는 황철웅(이종혁)이나 천지호(성동일)조차 멋있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여성 캐릭터들은 그렇지 못하다. 언년이는 날아오는 화살 앞에 그저 비명을 지를 뿐, 그 화살을 손목으로 받아내는 송태하 같은 능동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원손을 구하기 위해 달려야만 하는 송태하의 발목을 잡는(스스로도 극중에서 그런 대사를 한다) 그런 캐릭터다. 오히려 대길 패거리와 함께 다니는 설화(김하은)가 능동적으로 보이지만, 이 캐릭터 역시 민폐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기껏 노래를 불러주거나 말을 지키는 캐릭터다.

여각의 큰 주모(조미령), 작은 주모(윤주희) 역시 최장군만 바라보며 그를 연모하는 해바라기형 캐릭터들이다. 그들이 극에서 그 이외에 부여받은 역할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업복이 옆에서 애틋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초복이(민지아)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명나라 자객인 윤지(윤지민)가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였으나, 송태하의 단칼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러니 '추노'라는 사극에는 남성 캐릭터들은 우글우글한 반면, 이렇다 할 여성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다. 뇌성마비 연기를 하고 있는 이선영(하시은)이 호평 받는 것은 그녀가 이 남성들의 판이 되어버린 사극에서 그 설정 때문에 한 발짝 물러나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화살을 이다해가 맞는 이유도 명백히 보인다. 이다해가 연기자로서 어떤 주장을 하지 않은 것이 죄가 아니라면, '추노'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언년이 논란은 모두 제작진의 문제라고밖에 볼 수 없다. 화장은 연출에 의해 의도된 것이고, 노출 역시 의도된 신들이며, 그것을 갖고 블러 처리를 하거나 뺀 것도 모두 연출에서 한 것이지 이다해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년이의 수동적이고 민폐적인 캐릭터는 작가가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만큼 섬세하게 고민하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그러니 여주인공으로서 도드라진 이다해가 모든 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다해가 "여배우로서 사는 게 힘들다"고 토로한 것은 이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 속에서 여성 캐릭터를 하나의 인형이나 남성들의 판타지, 혹은 꿰다 논 보릿자루처럼 그려놓는 한, 그걸 연기하는 연기자는 그 한계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다. '선덕여왕'이 그린 여성 캐릭터와 '추노'가 그리고 있는 여성 캐릭터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듯이, 드라마를 보는 제작자의 여성에 대한 시선은 그 캐릭터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구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지 않을까. '추노'는 멋진 남성 캐릭터들의 전시장이지만, 또한 여성 캐릭터들의 무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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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Tracked from tattermedia's me2DAY  삭제

    <'추노'에 이다해가 연기할 여성은 없다> '추노'에는 멋진 남성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악역을 맡고 있는 황철웅(이종혁)이나 천지호(성동일)조차 멋있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여성 캐릭터들은 그렇지 못하다.

    2010/02/05 15:46
  2. 추노-여성캐릭터 논란

    Tracked from 안티고네 이야기  삭제

    시청율이 잠시 주춤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30%대의 안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드라마 추노. 그런데 배우 이다해씨가 연기하는언년/혜원 캐릭터가 노출, 연기력, 화장 등으로 계속 잡음을 듣고 있고 이에 대해 배우가 직접 '힘들다'고 말하는 사태에이르렀다. 심지어 네티즌들은 "언년"을 추노 최악의 민폐캐릭으로 꼽기도. 모든 일의 발단에 언년이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런 논조와는 다른 연예부 기사가 하나 등장했다. 추노는 처음부터 짐승남과 초콜릿 복근..

    2010/02/05 19:46

'추노'의 논란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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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7회 만에 시청률 34%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는 '추노'. 40%를 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고 말할 정도로 대중들의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높다. 그래서일까. '추노'의 논란 또한 끊이질 않는다. 이다해의 화장 얼굴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는 논란, 유독 노출이 많은 데다 어린 노비를 수청 들게 하거나 언년이(이다해)가 겁탈당하는 등의 내용이 가져온 선정성 논란이 그것이다. 심지어 이 선정성 논란을 의식한 블러 처리가 과잉 반응이었다는 논란까지 일어났다. 물론 논란 또한 관심의 표명일 것이다. 하지만 유독 '추노'에서 왜 이처럼 계속 논란이 쏟아지는 것일까.

먼저 이다해의 화장얼굴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는 논란은 물론 설득력은 있지만 조금은 과장된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극은 영상연출에 있어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기존 사극과는 달리 표현주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노'가 '300' 같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영상연출이 자연 상태 그대로를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연출자에 의해 효과적으로 연출되기 때문이다. '추노'에서 대길(장혁)과 태하(오지호)가 대결을 벌일 때 허공에서 두 얼굴이 멈춘 채 한 바퀴 카메라가 빙 도는 그런 장면은 물론 현실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만화적인 구도나 타 영화를 통해 그 장면이 주는 액션의 질감을 알고 있다. '추노'는 리얼한 영상이 아니라, 효과적인 영상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영상들은 끊임없이 감독에 의해 색채가 입혀지고, 느린 속도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빨라지면서 어떤 리듬감을 만든다. 대길이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그저 말을 타고 달리는 대길의 장면과는 천지차이의 이야기를 해준다. 이다해의 말끔한 얼굴은 이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에서 봤을 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의 목적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를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혜원(이다해)이 가진 정결한 모습은, 노비역할로 얼굴에 낙인이 찍힌 채 늘 검은 칠을 하고 있는 초복이(민지아)의 모습이나, 얼굴에 늘 화사하게 분칠을 하고 있는 설화(김하은)처럼 의도된 것이다. 이다해의 화장 얼굴 논란은 물론 이해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기존 사극과 이 사극의 영상연출의 차이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리얼리티 영상연출의 시각으로 보면 논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극의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을 생각해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선정성 논란은 왜 불거져 나오고 있을까. 그것은 이 드라마가 하층민을 다루고 노비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하층민들을 다루는 '추노'가 양반네들의 품격(?)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쩌면 비상식적인 일일 것이다. 그네들의 삶과 정서가 드라마에 묻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층민들의 드러낸 몸과 질펀한 농담은 그네들의 힘겨운 삶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들이다. 몸은 힘겨운 노동과 연관이 있고, 질펀한 농담은 그 힘겨운 노동 속에서의 유일한 여가(?)일 테니까.

따라서 '추노'가 몸을 드러내고, 질펀한 농담을 쏟아내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드라마 전략적으로도 맞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처럼 깊게 하층민의 삶을 다룬 사극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은 이 사극의 이러한 모습들을 낯설게 만든다. 따라서 '추노'는 그 소재에서부터 벌써 수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사극이다. 이것은 성적인 선정성뿐만 아니라 액션 장면에 등장하는 피가 튀는 리얼한 폭력 신에서도 그렇다. '추노'는 성인들의 드라마이지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그러니 제한을 15세가 아니라 그 위로 올렸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을 수 있다. 물론 TV라는 매체에 있어 나이 제한이라는 것이 그다지 효과적인 것은 아닐 것이지만.

어쨌든 '추노'가 인기만큼 논란도 많은 이유는 이 사극이 지금껏 사극이 다루지 않았던 영역을, 역시 색다른 영상연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추노'는 꽤 높은 완성도를 가지는 작품이지만, TV라는 매체에 방영되기에는 조금 앞서가는 느낌이 있는 사극이다. 바로 이 실험성 강한 작품과 TV의 관습적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는 논란을 야기한다. 그러니 이러한 드라마의 도전적인 실험과 거기서 발생하는 논란은 모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은 문제는 이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좁혀나갈 것이냐가 될 것이다. 논란은 어쩌면 그 거리를 좁히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추노'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한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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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에서 몸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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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추노'의 몸은 남자가 봐도 멋지다. 초콜릿 복근이란 표현이 선정적이라고 해도 딱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멋진 몸. 그 멋진 몸이 때론 공중으로 붕 떠오르고, 때론 뛰어내리며, 때론 바람을 가르듯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리고 이 예민한 짐승의 눈을 가진 레드 원 카메라와 강렬한 배경 음악은 이 몸의 동작들을 우아하고 리드미컬하게 만든다. 이건 액션이 아니라 무용에 가깝다. 그 속에서 몸은 멋지다 못해 아름답다.

한바탕 도망친 노비를 잡고 여각으로 돌아온 추노꾼, 최장군(한정수)이 땀에 젖은 몸을 씻는 그 모습을 훔쳐보며 설레는 마음은 큰 주모(조미령)뿐만은 아닐 것이다. 장군의 몸이 되고 싶었으나 한낱 노비 사냥꾼의 몸이 되어버린 그 몸은 장군의 갑옷은 입지 못했어도 갑옷 못지않은 멋진 몸을 갖게 됐다. 최장군의 몸은 냉철한 판단력에 맏형으로서 대길(장혁)과 왕손이(김지석)를 생각하는 그 따뜻한 캐릭터처럼 군더더기 없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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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독종 중의 독종으로 불리는 대길의 몸은 슬프다. 한때는 양반집 자제로 백면서생의 뽀얀 살결을 가졌을 그 몸은 이제 여기저기 난 칼자국을 훈장처럼 달고 있다. 그는 애꿎은 자신의 몸에 벌을 주고 있는 중이다. 그가 좋아했던 노비 언년이(이다해)의 오빠에 의해 멸문지화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찾아다닌다는 그 사실이 그를 인간 말종 추노꾼의 삶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몸은 상대방을 잔혹할 정도로 무표정하게 가격해대지만, 뒤에서는 자신이 잡아온 노비를 몰래 빼내 풀어줄 정도로 가슴 한 구석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한다. 그의 몸에는 분노와 자포자기와 연민이 뒤엉켜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가 되어버린 이 혼돈의 애증 속에서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언년이를 찾는다. 그것이 복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 채.

왕손이의 몸은 한 순간의 쾌락을 좇는다. 몸은 그저 늙어가는 것. 그러니 살아있을 때 즐기기 위해 그 몸은 쉴 새 없이 여자를 찾는다. 아직 젊기 때문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 순간을 살아온 몸에 마치 상이라도 주듯. 젊은 치기로 번득이는 이 몸은 그래서 웃긴다. 그 몸이 추구하는 방탕한 삶이란 한낱 한 때의 좌충우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청춘이 주는 시행착오 속의 몸은 그래도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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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추노'의 멋진 몸, 슬픈 몸, 웃기는 몸은 이 시대 민초의 삶을 설명하지 않고도 보여준다. 늘 머리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몸의 운명. 그 몸이 생채기를 입어도 허허 웃으면서 다시 아물고 더 팽팽해지면서 멋진 몸이 되는 것은 몸의 항변인 셈이다. 세상에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하나 뿐인 민초들의 삶을 보여주는 그 몸은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힘겨운 노동의 상처를 오히려 힘으로 아름다움으로 전화시키는 몸은 그래서 이 땅의 민초들을 그대로 닮았다. 그들의 살갗이 칼날에 찢기고, 그 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그 상처가 아물어 더 단단한 피부가 되는 그 과정을 담은 몸은 그래서 왜 그 몸이 그렇게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를 떠올리게 한다. '추노'는 그래서 정치를 얘기하지 않아도 정치적이고, 전쟁을 보여주지 않아도 더 참혹한 이야기를 몸의 언어를 통해 전한다. 레드 원 카메라의 저속 고속 촬영은 단지 식스 팩의 몸을 전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몸이 전하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아주 미세한 떨림까지 전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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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민초, 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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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에 어른거리는 루저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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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언제부턴가 남자와 '루저'라는 단어가 만나면 폭발적인 반향이 일어나는 사회가 되었다. '미녀들의 수다'에서 한 여대생이 건드린 이 '루저'라는 뇌관은 그잖아도 힘겨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꾸만 위축되어가는 남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해프닝이 아니었다. 김혜수와 유해진의 연애사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이 단어는 다시 등장했다. 외모와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의 연애담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의 열기를 띄었다. 그 기저에는 루저와 위너라는 남성들의 마음 한 구석에 담겨진 불씨가 들어 있었다.

실제 사회 속에서 우리네 남자들의 상황은 그다지 썩 좋지 않다. 남자들은 여전히 가장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으면서도, 여성성의 사회 속에서 조금씩 여성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형편이다. 청년실업이니 조기퇴직 같은 사회 분위기는 물론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힘겨운 현실로 어깨를 짓누르지만 문화적인 콘텐츠들은 상대적으로 여성 편향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방송에 있어서 여성 편향은 두드러져 왔다. 그것은 TV의 주시청층이 중년여성층이 되었기 때문이다.

힘겨운 현실에서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와 막 TV를 켰을 때, 거기 존재하는 판타지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현실로 돌아갔을 때도 어떤 힘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드라마의 캐릭터는 현실에 부재한 것에 대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작년 '아이리스'가 방영된다고 했을 때, 일부에서는 그것이 가진 남성적인 코드 때문에 성공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성공했다. 이병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액션과 멜로 양면을 잘 섞어내는 연기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남성적인 코드는 물론이고 여성적인 코드도 잘 맞춘다는 이야기다.

'아이리스'에 이어 방영된 '추노', 이 두 드라마는 장르도 다르고 이야기도 다르지만, 묘하게도 비슷한 점들이 있다. 먼저 '추노' 역시 마초적인 남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대길(장혁)과 태하(오지호)의 멋진 몸이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어떤 이야기나 메시지보다 더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것은 '아이리스'의 이병헌이 연기한 김현준이라는 캐릭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두 드라마는 모두 드라마로서는 보기 힘든 영화적 연출 장면들을 선보였다. 즉 영화적으로 연출된 장면 속에서 강한 남성들이 아름다울 정도로 멋지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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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사진출처:KBS)

게다가 '추노'는 그 캐릭터들의 면면을 통해 이 현실의 남성들의 억눌린 감성을 건드린다. '추노'는 양반가의 외아들이었다가 멸문하고 도망친 노비를 쫓는 추노꾼이 된 대길, 조선 최고의 무장이었으나 도망노비가 되어버린 태하, 그리고 그 사이에 서서 쫓는 자의 첫사랑이자 쫓기는 자의 마지막 사랑이 된 언년이(이다해)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대길은 아마도 현재 우리들의 입에 붙어버린 '루저'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겉으로 보면 인간 말종의 '루저'처럼 보이는 대길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멋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고 보면 작년 한 해, 드라마보다 예능 프로그램이 그토록 약진을 했던 데는 이런 루저와 위너라는 두 단어를 가슴 한 구석에 불씨처럼 품고 살아가는 남성들의 시선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 최고 히트 예능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 '해피선데이'의 '1박2일'과 '남자의 자격'은 모두 남성들을 캐릭터로 세우고 있고, 그 캐릭터들은 저 '무한도전'이 일찍이 세워두고 성공시킨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주창(?)하고 있다. 그 평균 이하가 열심히 하는 모습 속에서 공감과 감동과 웃음을 주었던 것이다.

'추노'의 남자들이 주목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평균 이하의 위치에 서 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짐으로써 현실에 치여 답답한 남성들의 가슴 한 구석을 열어준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마초적으로 보이는 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과거의 드라마 속 남자들이 돈과 배경 같은 권력을 통해 매력을 보이려 했다면, 이 남자들은 오로지 노동으로 단련된 멋진 몸뚱아리 하나로 매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에게도 매력적이다.

여성성으로만 포장된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 가요계에 '짐승남' 같은 마초적인 아이돌들이 등장하고, 드라마에서 '버럭남'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추노'는 그 연장선 위에 서 있으면서, 이른바 루저와 남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억눌린 감정을 터트리는 남성 캐릭터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추노'의 성공은 어쩌면 여성 편향적으로만 되어왔던 드라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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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극의 정점을 찍은 ‘선덕여왕’, 사극의 향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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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와 '제중원'(사진출처:KBS,SBS)

1999년 ‘허준’에서 비롯된 사극의 퓨전화는 2003년 여성사극 ‘대장금’을 통해 그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성사극의 등장과 성공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사극의 시청층이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렸고, 여성들이 즐기는 사극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또한 선 굵은 남성사극들(주로 전쟁사극이나 정치사극)과 달리, 섬세함이 주 무기가 되면서 여성 사극 작가들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대장금’, ‘선덕여왕’의 김영현 작가가 대표적이고,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대왕세종’의 윤선주 작가, ‘이산’, ‘동이(2010년 방영예정작)’의 김이영 작가 등이 모두 여성 사극 작가들이다.

여성들이 그리는 여성 사극은 당연히 여성성을 담아낸다.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고, 남성이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그 남성 속에는 여전히 여성성이 들어가 있다. 사극은 인물의 심리나 사건 전개가 보다 디테일해졌고, 감성 또한 풍부해졌다. 일련의 여성사극들은 과거에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의 뒤안길에 서있는 여성들을 역사로 끌어냈다. ‘대장금’이 그랬고, ‘황진이’가 그랬으며, ‘이산’(이 작품은 정조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모습과 성송연이라는 여성이 역사 위로 올라왔다)이 그랬다. 이러한 여성 사극 속의 인물들이 성장드라마를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억압받는 존재가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성장은 여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하지만 2009년 여성사극들은 이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처럼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남성들을 거느리는 여성 카리스마의 등장은 그간 여성사극들이 보여준 일련의 자신감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곳까지 올라간’ 이 여성들의 영웅담을 담은 작품들이 여성 사극의 정점이라는 야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천추태후’와 ‘선덕여왕’은 결이 달랐다. ‘천추태후’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지만 남성적 세계를 반복한 ‘무늬만 여성사극’의 한계를 드러냈다면, ‘선덕여왕’은 여성적 카리스마가 무엇인가를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여성 사극의 정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고현정)과 덕만(이요원)이 때론 대결하고 때론 토론하면서 보여준 여성적 카리스마의 세계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까지 매료시켰다. 여성성의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는(혹은 여성성의 사회로 바뀌어가야 되는) 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성별을 넘어서 이 사극이 보여주는 여성적 카리스마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실의 억압적이면서도 적까지 끌어안을 줄 아는 포용력은, 남성적 사회의 잔재와 여성적 세계관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사람들을 꿈꾸게 하고 때론 모성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덕만의 모습은 온전한 여성적 카리스마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덕만이 그 여성적 카리스마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우리네 여성 사극 역시 어떤 정점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사극이 일궈온 일련의 성장곡선이 여성사극 속에서 여성 주인공이 거치는 성장과정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여성사극에서 주인공의 성장이 어떤 정점에 올라갈 때, 그 사극은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리막길을 밟았다는 것은, 이제 정점에 서게 된 여성사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어쩌면 성별은 무의미해졌고, 오히려 여성사극이 가진 일련의 장점들, 예를 들면 성장드라마나 섬세한 심리묘사, 혹은 입체적인 캐릭터 같은 요소들이 오히려 여성적인 강박을 버리는 지점에서 새로운 사극의 진화가 시작될 거라는 점이다. 여성들만큼 남성들도 섬세하게 그려질 것이고, 왕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인물들이 신분적 위계에 갇히던 과거와는 달리, 동등한 눈높이에서 그려질 가능성이 높다.

퓨전사극으로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여성사극으로 신분과 성별이 가진 한계를 넘어버린 사극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서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스타일을 입은 장르화의 길이 되기도 하고(‘추노’가 대표적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중세와 근대가 섞여진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되기도 하며(‘제중원’), 여전히 여성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여성의 성장 드라마(‘동이’)가 되기도 한다. 2009년 ‘선덕여왕’이 여성사극의 정점을 찍음으로써, 2010년의 사극은 좀 더 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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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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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것은 여성사극이 일궈온 일련의 성장곡선이 여성사극 속에서 여성 주인공이 거치는 성장과정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여성사극에서 주인공의 성장이 어떤 정점에 올라갈 때, 그 사극은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

    2009/12/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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