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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웃어요'(사진출처:SBS)

'그대 웃어요'는 보면 볼수록 최불암을 닮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삶은 그렇게 힘겨운 것이라는 듯 잔뜩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사람좋은 인상으로 쇳소리처럼 바람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는 최불암은 바로 이 드라마의 얼굴 같습니다. 처음에는 왜 제목이 '그대 웃어요'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최불암이 그 특유의 웃음을 지을 때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목 앞에는 아마도 이런 문장이 생략되어 있었겠지요. '삶이 힘들더라도'.

'그대 웃어요'의 할아버지 강만복은 간암판정을 받았지만 손주의 행복한 결혼을 보고 싶어 그 사실을 숨깁니다. 자식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할아버지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역시 이를 숨깁니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밑바탕에는 이 숨겨진 마음, 힘겨운 현실이 자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숨긴 채 서로 웃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이 드라마의 희비극을 넘나드는 기막힌 설정은 보는 이를 울다가 웃게도 웃다가 울게도 만들어버립니다. 할아버지에게 간이식을 해주기 위해 결혼도 안한 손주며느리가 몸을 챙기는 그 눈물겨운 상황을 이 드라마는, 시어머니의 오해 즉 손주며느리가 임신을 했다는 상황으로 넘기면서 웃음으로 바꾸어버립니다. 간이식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밉상 사돈인 서정길(강석우)인 사실을 알게된 며느리 백금자(송옥숙)가 간을 달라며 쫓아다니면서 서정길의 술을 빼앗아 먹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눈물겹습니다.

결혼식을 하고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간다면서 사실은 떠나지 않고 호텔에 머무는 자식들과, 결혼식장에서 쓰러진 할아버지 때문에 혹 신혼여행을 망치지나 않을까 저어하는 시어머니는 전화통화를 하며 서로 거짓말을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지만 그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 설정 속에서 눈물과 웃음은 또 한번 교차합니다.

몸을 가눌 수 없어 비틀거리고 고통에 혼자 밤을 지새우면서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어주고 있는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흔히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있어서 행복한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건(그것이 빠르냐 더디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비극적인 상황이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야 행복하다고 이 드라마는 말합니다.

이 드라마에 절절한 공감이 가는 이유는 그 비극적 상황을 애써 비극으로만 비추어 눈물을 짜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힘겨움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그 힘겨움 속에서 어떤 행복감과 즐거움을 찾아내려는 이 드라마가 불황의 그늘 속에서 늘 찡그릴 수밖에 없는 고통을 느끼는 우리네 서민들에게 잠시나마의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웃으라고 하면서 눈물을 나게 하는 '그대 웃어요'는 참 고약한 드라마입니다. 그 우스운 설정에 깔깔 웃게 만들고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이 드라마는 참 못됐습니다. 그런데 그 고약하고 못된 드라마가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건, 아마도 저 허허로운 웃음 속에 삶의 무게까지를 담아내는 최불암을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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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와 2박3일(사진출처:동국아트컴퍼니)

자신은 정작 배우지도 못하고, 소처럼 일만 해온 가난한 엄마. 딸만은 다른 삶을 살게 해주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준 엄마. 냉수로 굶주린 배를 채우며 거짓 트림을 하면서 딸에게 밥을 덜어주고, 심지어 욕을 해대는 딸에게도 “나 아니면 누구에게 하소연 하겠냐”며 오히려 감싸주었던 엄마. 엄마는 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새끼, 보고 싶은 내 새끼. 너한테는 참말 미안허지만 나는 니가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니가 허락만 한다믄 나는 계속 계속 너를 내 딸로 낳고 싶다. 아가, 내 새끼야. 그거 아냐?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제일 보람된 것은 너를 낳은 것이다.”

그 엄마에게 딸이 찾아온다. 암에 걸려 남은 마지막 시간을 부여잡고. 떠나기 전 딸은 그때야 엄마라는 존재를 알아채고 이렇게 말한다. “나를 제일 사랑해주는 사람. 내 맘을 제일 잘 아는 사람. 나를 제일 잘 이해해주는 사람. 나를 제일 이쁘다고 하는 사람. 내 얘기를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바로 엄마라는 거, 나 이제야 알고 떠나요. 엄마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그리고 엄마보다 앞서간 딸은 엄마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맴돌며 이런 말을 남긴다. "다음 세상에선 제 딸로 태어나 주세요. 제게 주신 크신 사랑을 되돌려 드릴 방법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을 저미는 이 단순한 스토리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것은 <친정엄마와 2박3일>이라는 2009년 상반기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연극의 한 부분이다. 강부자가 어머니 역을 전미선이 딸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이 연극은, 이 땅의 무수한 엄마들과 딸들(심지어 남성들까지)의 심금을 울렸다. 막 눈물이 와락 쏟아질 것 같은 전미선의 얼굴이 찍혀진 포스터는, 연극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끌어당긴다. 그 표정 하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수많은 말을 우리들에게 건넨다. 그 앞에서 눈물은 무기력할 정도로 흘러내린다. 어째서 그럴까. 눈물은 정말 이다지도 상투적인 어떤 것일까.

또 다른 풍경 하나. 한 해상구조대원이 여행 온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은 3시 같은 남자”라고 말한다. 뭘 시작하기엔 늦은 거 같고, 뭘 끝내기엔 너무 빠르다는 뜻.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억지로 끌려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되고, 마침 쓰나미가 몰아닥친다. 그 사실을 안 '3시 같은 남자'는 그들을 구하러 헬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고, 여자는 구했지만 또 다른 남자를 구하는 도중, 헬기 레펠이 고장이 난다. 한 사람만 올라갈 수 있는 상황. 3시 같은 남자는 시계를 그 남자에게 풀어주며 말한다.  “이거 꼭 좀 전해주이소. 그리고 괜찮아요. 아직 3시 안됐어요!”  3시 같은 남자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바다로 떨어져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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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사진출처:JK필름)

1천만 관객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이다. 어찌 보면 뻔해 보이는 이 스토리는 그러나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하는 그 행위와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머 같은 유언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리게 했던 영화는 후반부에 와서 쓰나미라는 죽음의 그림자를 세워두고 그 유쾌한 관계를 비극적인 스토리로 바꾼다. 객관적으로 그 스토리 구조를 살펴보면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어쩌랴. 바보처럼 눈물이 쏟아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드라마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나는 경험을 하고는, “나 왜 이러는지 몰라”하고 자책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눈물은 늘 그렇게 주책없는 구석이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나, 그저 그런 시시한 유행가에도 쉽게 넘어가는 이 감상적인 놈. 그래서 어떤 눈물은 흘리게 되면 도리어 기분이 나빠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운운하지 않아도 눈물은, 우리 마음에 찰랑찰랑 채워지는 감정의 수위를 범람하게 하고 그를 통해 마음을 정화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부르는, 늘 뻔한 눈물범벅의 이야기를 보면서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어르신들이 계신 것은.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이른바 쿨한 시대다. 눈물 같은 축축함은 이 시대에서는 숨겨져야 할 그 무엇으로 치부된다. 우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이 실생활에서는 아니다. 우리의 생활을 둘러보면, (물론 그만큼 감동 없는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극단의 상황에 처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예외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는 우리네 삶은 그만큼 안전하다. 눈물의 상황 자체를 구질구질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들이 하는 것은 바로 이 타인의 상황을 회피하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틀로 매몰되는 것이다. 나와 남의 명확한 구분. 그리고 타인의 불행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명백한 금 긋기. 심지어는 스스로의 불행마저 불행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안간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몸부림.

현실에 없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문화 콘텐츠들의 판타지적 속성상, 이 현실에 없는 눈물은 이제 그 콘텐츠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TV 앞에서 연극을 보러 간 극장의 객석에서 콘서트장에서 그 어둠 속에 앉아 비로소 숨기고 숨겨왔던 눈물을 끄집어낸다. 무언가가 눈물샘을 건드리면 이미 수위에 도달해있던 눈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마치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을 흘린 것에 대해 변명하듯, 그렇게 흘린 눈물의 정당성을 찾아내려 한다. 작품이 너무 감동적이었어. 이런 정당성을 얻는다면 그 눈물은 주책이 아닌 의미를 찾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정당성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흘린 눈물에 대해 복수하듯, 작품을 저질 신파로 처분한다. 이제 눈물에도 어떤 격을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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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사진출처:JK필름)

하지만 눈물에 격이 어디 있으랴. 그것은 작품을 평가할 때나 그런 것이지, 우리의 눈에서 실제로 떨어지는 눈물에는 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신파적이고, 식상하고, 그저 그런 시시한 이유라고 해도, 우리가 실제 생활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눈물에는 저마다 진정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현실에서조차 어떤 잣대를 내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건 쿨한 게 아니라고. 눈물이 나와야 할 때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음으로 양으로 강요하는 모습이다.

눈물이 버려져야 할 그 무엇이 된 것은, 또 눈물이 구질구질한 인생의 대명사로 치부된 것은 어찌 보면 과도한 긍정론이다. 슬픈데도 웃으라니! 삶이 힘겨운데도 웃으면서 버티라니! 외부에 의해 가해지는 고통을 바라보고 솔직하게 반응하기보다, 그것을 내면화하고 숨기는 것. 우리에게 눈물은 약자의 징표처럼 여겨지는, 따라서 때로는 식상해져버린 상투가 되어버렸다. 모든 이들이 웃고 있거나, 무표정하게 있는 것.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은 것 같은 그 풍경. 저 밑바닥에 분명히 존재하는 눈물을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해온 생활의 훈련. 그래서 이제는 어둠 속에서나 가상의 스토리 속에서나 슬쩍슬쩍 눈물을 찍어내야 하는 얼굴. 그것이 우리네 삶의 얼굴이 아닐까.
(이 칼럼은 Yes24의 문화웹진 나비(nabeeya.yes24.com)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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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슬픈 이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은 세 번 자살을 시도한 대학교수 유정과 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 윤수의 만남을 다룬다. 학생시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당한 유정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분노를 밖이 아닌 안으로 터뜨리는 중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한편 용서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윤수 또한 빨리 사형이 집행되기만을 기다린다. 한쪽은 피해자고 다른 한쪽은 가해자다. 그런데 그 둘은 모두 소통의 창을 닫고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행시는 그런 둘이 만나 닫았던 창을 열고 소통하면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이야기다. 스타일은 휴먼드라마이고 진행은 전형적인 멜로 신파를 따라간다. 관습적인 장면들과 상투적인 사건전개가 대부분이지만 ‘울고 싶어’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100% 이상의 만족을 주는 영화다. 그런데 이 한 영화 속에 여러 층위의 눈물이 있어 주목을 끈다.

첫 번째 눈물 - 멜로
‘우행시’의 설정이 사회극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그저 남녀가 만나는 것이 아니고, 사형수 남자와 자살을 꿈꾸는 여자가 만나는 것이다. 그 어느 한 캐릭터만을 선택해도 하나씩의 사회극이 탄생할 정도의 인물들이다. 그런데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사회극을 포기하고 멜로 라인을 따라간다. 물론 그 멜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 같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사형대에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얘기하는 그 장면들이 이 영화가 멜로와 사회극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을까. 강동원이라는 존재감 있는 배우가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이젠 살고싶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나왔던가. 아니면 사형대에서 “유정씨 내 얼굴 까먹으면 안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던가. 굳이 사형대 시퀀스를 일일이 보여준 것은 ‘사형제에 대한 부당성’ 혹은 ‘인간을 죽이는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고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극적인 멜로를 위한 장치로서 사형대라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불치병이라는 신파 멜로의 틀을 사형대라는 장치로 변용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 클라이막스에서의 눈물은 어딘지 깊은 울림이 없다.

두 번째 눈물 - 관습적 장면들
영화가 멜로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좀더 사회적인 접근을 요하는 장면들은 관습적인 장면들로 채워졌다. 영화가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두 사람간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이지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사회적인 고민이 아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 소개되는 장면들은 너무나 상투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우리는 굳이 그 상세한 전후사정을 몰라도 눈먼 동생을 데리고 추운 거리를 떠도는 어린 윤수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 슬픔을 느낀다. 아니 눈먼 동생의 때에 절은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슬픔은 영화가 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가졌던 슬픔을 영화는 슬쩍 가져온 것뿐이다. 폭력 아버지에 매맞는 엄마로 대변되는 윤수 형제가 처한 상황 역시 관습적이다.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고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 또한 그렇다. 이러한 눈물은 영화 자체의 힘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환기능력, 혹은 이 불합리한 사회가 준 눈물이다. 사회적 문제에서 끌어온 눈물이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대해 어떤 문제제기까지는 하지 못한다. 게다가 ‘가난한 삶이 범죄를 불렀다’는 가난과 범죄의 운명적 도식을 단순화해놓는다.

세 번째 눈물 - 인간에 대한 용서
멜로도 관습적인 장면들도 깊은 울림을 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무언가 다른 눈물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 영화가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장면들을 계속 내보내는 중간, 단 한 시퀀스가 시선을 끈다. 그것은 바로 윤수가 돌발적으로 살해한 파출부의 어머니인 박 할머니(김지영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딸을 살해한 살인범을 고통스러워하면서 용서하는 이 어머니의 장면은 가장 리얼하면서도 독창적이며 영화의 주제에 단숨에 접근하는 힘이 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을 뛰어넘는, 모성애적인 용서는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려했던 것이다.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오마... 제발 살아있어라”라는 박 할머니의 말 한 마디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멜로 신파를 선택했지만 그것이 아쉬운 것은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한 용서’라는 좀더 깊은 감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래 하려던 이야기는 바로 ‘용서’였다. 박 할머니의 이야기는 멜로에 가려진 몇몇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유정이 윤수에게 자신이 학생시절 당했던 이야기를 했을 때, 윤수가 “미안하다” 고 말하는 장면은 용서와 사랑이 남녀관계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다. 박 할머니의 이야기는 좀더 영화 뒤쪽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었다. 영화 중반부에 이미 하려는 이야기를 다한 영화는 이후부터 멜로 라인을 향해 달려간다.

세 종류의 눈물이 말해주는 것
그것이 멜로이든, 관습적 장면이든, 용서든 간에 ‘우행시’는 분명히 사회의 불합리함을 꼬집는다. 결국 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사회가 한 사람에게 어떻게 고통을 주고 그를 죽이는가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윤수를 고통스럽게 했던 아무런 안전망 조차 없는 사회에 대한 질타와 유정을 세 번 자살 시도하게 만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게 사랑이던 종교이던 용서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작은 존재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위로하는 장면들은 슬프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역설적 제목에는 사회의 책임의식에 대한 비판과 체념이 모두 들어 있다. 사회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지만 그들은 그런 사회에 보복하듯이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할 건 그 “행복하다”고 말하는 많은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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